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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환경 조성] 삶의 주인이 될 권리

2022-07-04

어떤 아이는 학원으로 빼곡히 채워진 일상을 살며 과도학 학습량을 버텨냅니다. 일찍부터 부모가 정해준 입시 트랙에 오른 아이는 자신의 호기심을 탐색하고, 경험을 확장하며,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성장할 기회를 빼앗긴 건 아닐까요? 정말로 아이들의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아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까요? 퓨처랩 오드리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얼마 전 PC통신과 인터넷의 등장으로 나타난 신조어들이 심각한 언어 훼손을 야기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담긴 90년대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사에서 예로 든 건, ‘하이루’, ‘방가방가’, ‘즐팅’. 속으로 피식 웃고 넘어갔지만, 기사를 계기로 언어는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가 가장 직접적으로 발현되는 매개체라는 걸 새삼 떠올렸습니다. 


최근에는 초보자나, 미숙한 상태를 뜻하는 말로 ‘O린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90년대 기사에서 ‘하이루’와 ‘방가방가’를 우려하였듯이, ‘O린이’, ‘잼민이’, ‘초딩’ 등 어린이에서 파생된 신조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그런데 100년 전에도 ‘O린이’, ‘잼민이’와 같은 단어가 존재했다는 사실, 알고 계세요? ‘아해놈’, ‘어린 것’... 등 고전에서도 자주 접한 낯설지 않은 표현인 걸 보면 100여 년 전 사회와 문화에서도 어린이는 존중과 사랑을 받는 존재로 여겨지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를 비롯해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 지난 100년 중에 몇 년을 ‘어린이’로 살아왔는데 말이지요! 

시행착오를 통해 배울 권리

올해 여섯 살이 된 제 딸은 수줍음이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누군가 묻는 물음에 인사 혹은 대답을 망설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른들의 물음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아이를 보며 속에서 부글부글한 무엇이 끓어올랐습니다. 


“다른 사람이 인사하거나, 물어볼 때는 대답을 하는 게 매너야.”라며 조용한 곳에 가서 아이를 다그쳤습니다.

“나는 (대)답이 빨리 생각이 안 나… 으아앙…!!”


눈시울이 뻘겋게 변하고, 끝내 울음이 터진 제 딸의 대답이 저를 반성하게 했습니다. 저는 아이에 비해 사회적 경험이 많다 보니, 갑자기 만난 누군가가 묻는 말에도 쉽게 대응할 수 있지만, 아이는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이어서 빠르게 대응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창의학습 환경과 문화를 조성하는 일을 하며, 스스로 다짐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친구들이 스스로 경험하고, 부딪히며 시행착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권리를 나의 경험 데이터를 활용해 빼앗지 말자! 인데, 아이를 향해 갖고 있던 제 선입견이 아이 내면에서 고민하고, 연구하는 시간을 빼앗아버린 것이지요.  

 

6살 아이의 느릿한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내 상황으로 직면하면 힘든 일이 되는데, 자녀의 학습은 오죽할까요? 부모님들의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해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조급하고 불안한 것은 ‘내(부모)’ 마음입니다. 아이는 서툴고 느리더라도, 새로운 배움의 과정에서 느끼는 호기심과 시행착오를 통한 골몰하는 탐구심, 성취로 인한 환희를 누리며 성장합니다. 

저는 7개의 학원에 다닙니다.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몇 년 전, 8명의 초중등학생과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다큐멘터리를 창작하는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거장 이욱정 PD와 함께하며, 다큐는 참(true)를 기반으로 창작자의 시선이 담기는 과정임을 알아갔습니다. 참과 거짓에 대해 재미있게 알아보기 위해 참여자들은 자기에 대한 참(true) 3가지와 거짓(false) 1가지를 이야기하고, 참과 거짓을 알아맞춰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여자 중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한 친구가 “저는 7개의 학원에 다닙니다.”라고 말했고, 현장의 모두가 놀랐습니다. 이욱정 PD님과 퓨처랩 스태프들은 너무 많아서였고, 다른 아이들은 “6학년이 학원을 7개밖에 안 다닌다니 말도 안 돼!”라며 학원 갯수가 적어서였습니다.

 

대다수의 청소년은 자기 시간에 대한 결정 권한이 없습니다. 교사와 부모가 제시한 스케줄 대로 일과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시간의 주권이 없다는 것은 시간 활용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관심사를 발견하고, 확장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작은 경험이 쌓여야, 내가 무엇을 선호하는지, 또 어떤 것을 쉽게 익히고, 반대로 어려워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경험의 축적으로 인한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지요. 지난 7여년 간 퓨처랩에서 만난 아이들은 워크숍 마지막 날이 되면, 매번 참여자가 달랐음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 엄마한테 이거 또 할 수 있게 얘기해 주세요!” 


부모님의 시선에서 보면 퓨처랩 워크숍이 아무래도 입시에 직결되는, 시험 점수를 올리는 활동으로 보여지지 않다보니, 아이들이 관심과 흥미를 발견하는데에만 머물러 안타까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입시를 위한 국영수 학습은 10여 년간하고, 또 하고 반복하는데 말이지요.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는 삶의 선택을 연습하는 경험이 꼭 필요합니다. 스스로 흥미와 관심을 발견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위대한 에너지와 자기 동력은 오래도록 지속됩니다.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

영화 <트루먼 쇼>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삶이 인위적으로 설계, 조작되어 스스로 TV 프로그램인 줄 모른 채 30년간 전 세계로 송출되는 쇼의 주인공인 트루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2018년 <트루먼 쇼>의 한국 재개봉을 기념하는 포스터에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라는 문구가 적혀있어, 영화의 내용과 더불어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소년기의 삶의 목표는 대체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좋은 대학 진학을 위해 영어는 유아기에 시작, 5세에는 ‘파닉스’, 예체능은 저학년 때 마스터해야 하며, 2년 정도 선행학습은 기본에, 요즘은 학업 성적뿐만 아니라 여러 활동을 통해 학생생활기록부도 관리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진학 공식이 부모들 사이에 족보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설계된 성공 공식에 아이들을 끼워 맞추고, 주인공의 액션이 시나리오(=공식)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성공한 인생에서 멀어진 양 걱정합니다. 이건 어쩌면 당신의-이전에 어린이였던, 그리고 지금의 어린이-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모두는 자기 삶의 주인

지난해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프로젝트를 고민하며, 퓨처랩은 청소년 헌장을 살펴보았습니다. 헌장의 시작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스태프 모두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퓨처랩의 첫 마음으로 돌아가 프로젝트를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청소년은 자기 삶의 주인이다. 청소년은 인격체로서 존중받을 권리와 시민으로서 미래를 열어 갈 권리를 가진다. 청소년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활동하는 삶의 주체로서 자율과 참여의 기회를 누린다. 청소년은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며 정의로운 공동체의 성원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간다.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국가는 위의 정신에 따라 청소년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청소년 스스로 행복을 가꾸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여건과 환경을 조성한다.  - 청소년 헌장 중 


어린이와 청소년은 절대적 시간의 차이로 인한 경험 부족으로, 성인과 같은 빠른 판단과 결정이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미숙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배울 권리를 가진,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는 인격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스스로, 자기 관심과 흥미를 발견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시간과, 인위적으로 설계된 삶의 매뉴얼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커뮤니티를 보장하고,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울 권리를 누리는 사회와 문화. 2030 뉴스에서 신조어를 다룬다면, 어린이가 인격체로 존중받는 사회와 문화가 만들어낸 언어의 변화가 등장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한때 어린이였던 저와 여러분, 어린이 시절을 거쳐가는 중인 내 어린 친구들, 앞으로 어린이가 될 모두를 위해!


글 | 오드리 (퓨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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